기록/일상

의류수거함 속 고양이

날고싶은병아리 2022. 7. 22. 09:19

며칠 전 아파트 주민 중 한 분이 공사 중이 열어둔 문으로
고양이가 탈출했다고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셨다.

퇴근길에 근처 우체국에 들렸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지 않고 단지 입구로 들어가는데
아파트 입구 경비실 뒤 분리수거장에서 희미하게 고양이 소리가 야옹야옹 들리는 게 아닌가.

계단실이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왜 야외 분리수거장에서 소리가 들리는 걸까.

 

분리수거장

분리수거장 중간 얕은 담벼락 위에 누군가 고양이 밥과 물을 올려둔 게 보인다.
고양이가 아파트 현관문을 돌파해 나오기가 쉽지 않을 텐데.
이미 고양이가 탈출한 지 반나절이 지났으니 근처까지 왔다가 냄새를 맡고 온 걸까.

주변을 조심히 돌아보면서 고양이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찾아다가
혹여 나 때문에 고양이가 멀리 도망갈까 고양이를 잃어버리신 분에게 전화를 드렸다.

잠시 후 부부로 짐작되는 두 분이 헐레벌떡 오셔서 츄르 한 개를 들고 고양이 이름을 부르며 고양이를 찾으신다.
조금 더 찾는 걸 도와드리다 먼저 집으로 올라왔다.

 

한냥, 두냥

괜히 집에 잘 있는 고양이들을 한 번 만져주며

니들은 탈출하지 말아라 말해본다.

다행히 저녁 무렵 고양이를 찾으셨다면서 연락이 왔다.
그런데 찾으신 곳이 다른 곳이라고 하신다.

아까 그 고양이 소리는 길 고양이 소리인가 보다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양이들은 구석진 곳에서 혼자 냥냥 거리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다음 날 퇴근길.
아파트 입구에서 괜히 찜찜한 마음에 귀에서 이어폰을 뽑았다.

그 고양이 소리가 또 나고 있다.

다 큰 고양이라면 이미 다른 곳으로 갔을 것이고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는 아니니
이건 분명히 어딘가 갇혀 살려달라고 울고 있는 거다.

불안한 마음에 분리 수거장 이곳저곳을 돌아보다가
의류수거함에 귀를 대자 그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다른 곳에서 나는 소리겠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의류수거함 입구에 핸드폰을 넣고 사진을 찍어봤다.

 

의류수거함 속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어서 그런가 사진이 흐릿하다.
이번에는 잘 찍히길 기도하며 다시 사진을 찍는다.

 

의류수거함 속 고양이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인다.
새끼도 아니고 성묘도 아닌 중간 정도 되는 고양이.

주변에 놓아둔 먹이를 먹고 담벼락과 쓰레기통을 밟고 어슬렁거리다 떨어진 모양이다.
이곳저곳 분뇨가 보이는 걸로 보아 하루 이틀 갇혀 있던 게 아닌 것 같다.

의류수거함을 열 방법이 없어
바로 앞에 있는 경비실을 찾아가 사진을 보여드렸다.

의류수거함 열쇠는 의류 수거업체만 가지고 있고 어제 왔다 갔다고 한다.
며칠 전부터 계속 고양이 소리가 나더니 거기 숨어있었구나 하고 말씀하시며
안 쓰는 분리수거장이라 그곳에서는 의류수거를 안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의류수거함 입구가 벽 쪽으로 있었다.

무더위에 바람 한 점 없는 깜깜한 철통 속에서 얼마나 덥고 힘들고 무서웠을까.

늘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느라 전혀 몰랐다.
주민들은 그냥 길고양이 소리겠거니 그냥 지나갔을 테고.
탈출한 고양이가 아니라면 나도 그랬을 거다.

야생동물 구조센터에 연락을 해보겠다고 하시길래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고 집으로 올라왔다.
집에서도 계속 가슴에 돌 하나가 얹혀 있는 기분이라 집에 있던 사료를 물에 불려 비닐봉지에 담아 내려갔다.

 

옆으로 눕힌 의류수거함

분리수거함으로 가자 경비 아저씨가 의류수거함을 옆으로 눕히고 계셨다.
말씀하시기로는 야생동물 구조센터에서는 도와주지 못한다고 답변을 받으셨다고.

경비 아저씨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목도 마르고 배도 많이 고팠을 고양이를 위해
의류수거함 입구에 물에 불린 사료를 살포시 놓아두었다.

 

의류수거함

두 시간 정도 후 다시 사진을 찍어보자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놓아두었던 사료를 조금 먹었는지 아니면 나오면서 건들기만 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놓아둔 모양과 다르다.
뭐가 되었든 고양이는 무사히 탈출한 모양이다.
아마도 인기척이 사라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도망갔을 거다.

탈출했다가 집으로 돌아간 고양이의 집사분들은 고생이 많으셨겠지만,
그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 한 마리를 살렸다.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사료를 다시 집어 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구름이 많아 하늘이 흐리다.
시원하게 비가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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